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한국-세내갈 평가전

축구장에 축구를 보러 간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열이 덕에 상암엘 갔었는데
역시 스포츠는 경기장에서 봐야 재맛이다.

일층 맨 앞열에서 보았는데 TV에서 봤을때 보다 훨씬 빠르고 몰입이 잘 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탄성과 박수가 절로 나왔다.

기승용과 오범석이 골을 넣었지만 가장 큰 인기는 차두리가 아니었나 싶다
경기장 관중모두 차두리가 공을 걷어내거나 질주를 하면 너나 없이 다를 환호를 했으니까
수비수로서의 플레이도 잘 했었다.

차두리는 정말이지 그라운드의 에너자이저다.

더군다나 내 뒤에 차두리 팬 머슴아 둘이서 <발엇질러 차두리>라는 질럿에 차두리얼굴을 매핑한 플랜카드를 차두리가 교체 될때까지 들고 있었다. 환호도 대단했는데
아숩게도 카메라에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걔네들을 보면서 경기장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고 다 카메라에 잡히는건 아니구나라는 걸 알았다.
부현 왈 '걔네들 여자 였으면 잡혔을 거야' 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 말이 맞는듯 도 하고.. ㅋㅋ

축구장에서 음식을 재대로 먹을 수 있을까?
축구는 야구 보다 스피드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이 경기보는데 지장을 줄거라 생각을 했는데 이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반전 내내 오른손엔 닭 또는 만두 빵이 왼손엔 맥주가 들려있었다.
선수들이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것 많큼이나 오른 손과 왼손, 입이 바빳는데 전혀 몰입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배가 부르니 경기가 훨씬 재밋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

장당 5만원이나 하는 티켓4장을 예매해서 축구를 보여준 재열에게 다시 한번 감사..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1년3개월만의 휴식, 3시간 그리고 몽유도원도

지난 목요일은 정말이지 기쁨과 고통의 하루..
입사후 처음으로 쉬어보는 첫날의 기쁨 하지만 기쁨도 잠시
몽유도원도를 보기위해 3시간 넘게 서 있으면서 이걸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갈등의 연속이었다.

오전에 동생이 보자고 해서 흔쾌히 승낙했지만,
막상 박물관에 도착해보니
이런 세상에 ... !!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기다림에 합류 했는데 장장 3시간이나 걸릴줄이야.
정작 몽유도원도는 1분도 채 못봤다. 봐도 조명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유리에 묻은 손가락 지문들이 하얀 눈밭에 똥개 발자국 마냥 선명하게 보였을 뿐...
정말이지 가슴찡한 그러한 감동이 밀려 왔어야 했는데, 개인적으로 무릎이 찡하고 허리가 찡한
그런 관람이었다.
에궁.. 황금 같은 나의 월차 하루가 날아갔다. 안평대군의 꿈과 함께..

집에 오는 길에 명동의 꽁시면관에 들렀다.
예전부터 한번 꼭 가봐야지 하던 곳이었기에
전철역에서 내리자 마자 그리로 향했다.

소룡포와 마파두부를 시켰다.
신기하게도 만두안에 국물이 들어있었다.
중국의 어느 음식점은 소룡포안에 국물만 있다고 하던데
다만 소룡포 끝맛이 나만 느낀 건지 몰라도 약간 조미료 맛이 나서 아쉬웠다.

아직까지 내 입맛엔 만두는 인사동의 궁이 최고~ 최고..

준이 덕에 생각지도 않은 박물관도 갔다오고
하긴 한달 전에도 갔다 오긴 했지만,
그때는 부현이의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그러고 보니 그날은 성대 앞의 페르시안 궁전이란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박물관을 갔다온 날은 다른 나라 음식을 먹었군..ㅎㅎ

몽유도원도는 그림도 길지만 그 옆에 붙은 문장도 긴데
궁금해서 찾아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라고 한다.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박팽년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 신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